우리는 더 이상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한병철의 『사물의 소멸』은 현대사회에서 사물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진단하는 철학적 에세이다. 여기서 ‘사물’은 단순한 물체가 아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기억을 저장하며, 시간의 깊이를 품고 있는 존재다.

요즘 따라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간다. 사진은 폰에 저장되기 무섭게 잊히고, 글은 스크롤 한 번이면 사라진다. 손에 잡히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게 더 중요해진 이 시대에, 한병철은 묻는다.
“우리는 아직도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오래된 책의 눅진한 종이 냄새, 직접 꿰맨 자국이 남은 옷 한 벌, 가족사진이 붙은 냉장고의 손때 묻은 손잡이. 이런 사물들은 우리와 함께 시간을 겪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대부분의 것을 ‘가볍고 빠르게’ 소비한다. 디지털화된 이미지, 표면적인 경험, 쉽게 교체되는 기계들. 깊이 대신 속도, 지속 대신 업데이트가 지배한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노출하고, 측정하려 한다. 사물은 원래 침묵하고, 저항하고, 기다리게 만들었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도,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아름다움조차 ‘좋아요’와 ‘팔로워 수’로 환산되고, 이미지는 상품처럼 유통된다. 그는 이런 상태를 ‘사물의 소멸’, ‘세계의 평면화’라 부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중 하나는, 사랑도 사물처럼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진짜 사랑은 타인을 알아가고, 시간을 들이고, 마주 앉아 머무는 일인데, 우리는 효율, 자기관리, 즉시 반응만을 좇는다.
결국 사랑도, 관계도, 사물처럼 깊은 세계와 연결되지 못한 채 가벼워진다.



『사물의 소멸』은 우리에게 사물을 다시 보는 눈을 요청한다. “사물을 되찾는다는 것은, 깊이를 되찾는 것이다. 기억, 기다림, 시간, 관계.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존재 방식을 되묻는 일이다.”
나는 이 책을 덮고 나서 괜히 내 책상 위 오래된 머그컵을 한참 바라보았다.
손잡이의 금이, 묻은 얼룩이, 내가 살아온 시간처럼 느껴졌다. 사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그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라졌을 뿐이다.
“사물이 사라질수록, 우리는 더 가벼운 인간이 되어간다. 하지만 진짜 삶은 무게가 있고, 손에 잡히고, 기억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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